
아날로그적 인내’가 중요하다
숫적 성장은 목표 아니다…믿고 기다리는 시간 필요
▲ 이재욱 목사
이제 더 이상 교회 문화가 세상 문화를 앞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대중문화의 변화는 너무 빠르고, 거대하다. 큰 자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까만 몰두하는 연예 회사들도 견뎌나가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이미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가 되어 있는 청소년 들을 세상보다 앞서가는 문화로 교회에 불러 모으겠다는 생각은 놓아야 할 때가 한참 지났다. 그렇다고 문화 사역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앞서거나 따라 잡지는 못할 지라도 어느 정도 시대의 코드를 발맞춰 가는 것은 분명 지금도 필요한 일이다.
동시에 이 시대 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다른 강력한 무기에 우리의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바로 ‘진정한 관계성’이다.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도 날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어린 위로보다 감동적이지 않다. 페이스북에 있는 수백, 수천 명의 친구도 늘 내 곁을 지켜주는 한 명의 죽마고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첨단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갈급해 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완전 아날로그’이다. 관계성 속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를 지내고 있는 청소년들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청소년들은 진정한 관계가 갈급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불안정함을 통과하는 시기에 자기를 견뎌줄 관계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불안한 땅에서 인도자가 되어줄 관계가 필요하다. 그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든 못하든 그들 속 깊은 곳에는 그 갈급함이 있다.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청소년 사역자들이 이 부분에서 아이들과 연결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활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교사와 목회자, 즉 사역자들이 청소년들과 진정한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저 없이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요건이 있다. 그것은 ‘인내’이다. 참고 견디는 것이야 말로 청소년 사역의 가장 큰 미덕이다.
아날로그적 관계라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 아날로그는 시작지점에서는 조금 따분해 보일수도 있다. 아이들식 표현으로 재미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르익으면, 디지털에서 얻을 수 없는 강력함이 있다. 그 관계가 무르익을 때까지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결코 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청소년 사역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사역자들이 견디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청소년 시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에 그렇다. 청소년들을 잘 모르고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다가 지레 상처를 받고, 낙망하는 사역자들을 많이 보았다. 포기할 일이 아니다. 견디며 알아가고 배워야 한다.
둘째, 아이들이 빨리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은 은연중에 거꾸러지고 뒤집어지는 영혼의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현장은 녹녹치 않다. 아이들보다는 사역자가 먼저 거꾸러지고 뒤집어지기 십상이다.
셋째, 숫자에 대한 조급함이 생기는 경우이다. 청소년 사역은 대충 둘러쳐서 마구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사역이 아니다. 그 어디보다 치열한 한 영혼에 대한 싸움의 현장이다. 아이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끈기의 싸움이 필요한 자리이다. 숫자에 매이면 한 영혼이 보이지 않고, 그러면 진정한 관계가 불가능해진다.
필자가 중고등부서를 맡아 사역했던 10년 동안 여러 차례 많고 적은 숫적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였을 뿐, 한 번도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 맡겨주신 영혼을 최선을 다해 돌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더 맡길만하면 더 보내주실 것이다.
청소년 사역자여. 견뎌라. 아이들과의 진정한 관계의 문이 열리기를. 그리스도를 붙는 나의 삶과 가르침이 그 아이들에게 전해질 그 길이 열리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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