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교 총장 후보 유재원 교수(63)는 또 다른 총장 후보인 정일웅 교수가 자신을 누르고 총장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을 접었다. 유 교수가 정 교수를 새롭게 평가하게 된 것은 자신과 맺은 서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서를 쓰고 증인까지 있었던 서약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했던 약속이었다. 또 총신대와 교단을 위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물러서는 형태의 서약인 만큼 대의 앞에 소탐을 버린다는 면에서 지키는 사람에게는 칭찬이 쏟아질 것은 뻔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한 정 교수는 막상 약속을 지켜야 할 그 시간에 현장에 나타나지 않더군요."

유재원 교수와 정일웅 교수 그리고 서약 주선자이자 증인이었던 박충규 목사(예장합동 서북노회 노회장), 이 세 사람 사이에서는 과연 어떤 서약이 존재하였던 것일까.

9월 5일 총신대학교 신임 총장 선출을 위한 5번째 전체 이사회 1차 투표 결과는 유재원 교수 66표, 정일웅 교수는 55표가 나왔다. 유 교수가 다득표자였지만 3분의 2의 지지를 얻지 못해 재투표를 해야 할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다.

그때 박충규 목사가 강단에 등장해 "두 교수를 만나 1차 투표에서 지는 사람이 사퇴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두 사람의 사퇴서를 갖고 있으며 진 사람이 와서 사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유·정 교수와 박 목사 사이에 있었던 서약의 실체는 이렇게 드러났다. 무려 4번이나 총장 선출이 무위로 돌아가자, 두 후보 간에 1차 투표에서 다득표에 실패한 후보가 스스로 사퇴하겠다는 서약서가 작성된 것이다.

유 교수에 따르면 이 각서는 이사회 개최를 약 1시간 앞 둔 9월 5일 12시 학교 앞 식당에서 작성되었다. 물론 각서는 이사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사회가 이 각서를 인정하든지 말든지 두 사람 중 다득표에 실패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후보직에서 사퇴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강단에 서서 이 각서를 수용할 것인지를 이사회에 물었다. 당연히 정일웅 목사 지지자들로부터 반대가 쏟아졌다. 특히 김영우 목사(예장합동 기관지 <기독신문> 주필)는 "임원회의 결의가 아닌 개인 의사일 뿐이다"라고 강경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다.

결국 두 사람을 놓고 또다시 투표가 실시됐지만 결국 8번의 시소게임 끝에 누구도 3분의 2의 지지표를 얻지 못해 총장선출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각서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던 셈이다.

	▲ 유재원 교수는 정일웅 교수 스스로 총장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하지만 유재원 교수에 따르면 각서 작성 과정은 매우 진지했고 심각했다. 각서의 내용을 지키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 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는 딱딱했다. 우선 박충규 목사가 유 교수에게 이사회 당일 5일 오전 9시 20분 경 전화를 걸어 서약서를 작성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두 후보와 박 목사가 서울 사당동에 있는 백제갈비 집에서 만난 것은 12시 5분 경. 박 목사와 정 교수는 함께 나타났다. 그 곳에서 두 사람은 박 목사의 중재로 총신대 운영이사장 앞으로 서약서를 작성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금일 1차 투표에서 최다득점 획득에 실패할 경우 후보직을 사퇴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을 쓰고 자필 서명을 했다.

서약서 작성 당시 박충규 목사의 다짐은 가히 엄포 수준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가만 두지 않겠다. △이사회가 서약서를 반드시 받아들이도록 하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당시 정일웅 교수의 이야기도 비장한 것이었다. 유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선거란 피곤한 것이고 정치하는 사람들 들러리 밖에 되지 않는 점이 한심스럽다. 유 교수님이 이기면 나는 이사회실로 들어가 단에 올라가서 사퇴를 선언하고 박수를 받고 내려오겠다. 그리고 유 교수님을 전폭 지지하겠다. 이사들이 얼마나 이 사퇴를 위대하게 생각하겠는가."

유 교수는 정일웅 교수가 총장직에 얽매이지 않고 위대한 교수로 남겠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교단과 학교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린 두 사람은 사이좋게 학교로 향했지만 잠시 후 그 약속은 보기 좋게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박충규 목사는 이사회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묵을 지켰고, 정일웅 교수는 1차 투표가 끝난 후 현장에 나타나지 않다가 2차 투표에서 역전돼 자신이 다득표자가 되자 이사들과 웃으며 악수를 교환했다.

정일웅 교수는 왜 이처럼 행동을 했을까. 다음은 정 교수의 이야기다.

"당시 이사회에서 각서가 효력이 없는 것으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나는 현장에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오지 말라고 해서 가지 않은 것 뿐이다."

이제 유재원 교수는 한 때 멋있는 라이벌이었던 정일웅 교수를 향한 신뢰의 끈을 놓아 버렸다. 이제 유 교수는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 교수가 총장 후보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서약 중재자인 박충규 목사에게도 정 교수를 사퇴시키는데 적극 앞장서 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총신대학교 총장 선거를 둘러싼 추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예장통합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는 이미 선출된 총장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결단을 내려 총신대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총신대가 극단적인 지역과 파벌 싸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총장을 선출하지 못하는 불명예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것으로 보인다.